아무도 없는 공휴일의 극장. 분장실에 앉아있는 것은 한 남자였다. 이제 막 40대 중반으로 들어선 남자 미야베 노리유키는 순백의 여성용 기모노를 입고 거울 앞에 앉아, 기모노 색만큼이나 희어져 본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얼굴 위에 막 눈두덩과 입술을 붉게 칠해나가고 있었다. 한동안 섬세한 손놀림으로 천천히 덧칠해나간 끝에 겨우 화장을 완성한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옆에 놓여 있던 가발을 천천히 썼다. 그리고 다시 거울을 마주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희디희면서도 단아한 여인이 입술 끝을 올려 겨우 웃었다. 어찌 보면 남편의 상을 당한 여인같은 웃음이었다. 서글픈 인상의 그녀를 한동안 응시하다가,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분장실을 나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관객이 기다리는 무대였다.
아무것도 없는 무대에 올라서자 어두운 관객석 앞자리에 단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검은 와이셔츠 차림의 남자였다. 키가 크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젊은 남자. 하지만 그의 눈은, 이제 무대에 선 남자를 욕망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 시선은 차라리 눈으로 '탐하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무척 강렬했다. 미야베는 그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젊은 남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의 그를 거부하는 자신의 몸과 기억이 증언하듯. 자기가 그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이해하는' 관객이라 고백해왔던- 그 집요한 남자를 자신은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남자는, 무엇보다도 몇 시간 전에 그를 여기까지 끌고 와서 '공연해달라' 며 애걸해왔던 장본인이다. 그는 말없이 젊은 남자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체념한 듯 몸을 놀리기 시작했다. 정식 공연이 아닌지라 연주자도 상대 배우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옷자락을 날리며 연기를 해나갔다. 그저 옷자락이 허공에, 바닥에 스치면서 내는 간지러운 소리와, 그의 대사, 그리고 발소리만이 이 공연의 전부였다. 하지만 나머지 요소의 부재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젊은 남자는 예의 그 강렬한 눈빛으로 그의 몸놀림 하나하나를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때때로 아아, 아름답다. 라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어느 순간, 미야베는 문득 동작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맞은편의 남자는 돌연한 그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금새 1막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한 듯이 무대 앞으로 다가갔지만,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뗀 것과 동시에- 무언가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그의 얼굴에 튀었다.
".....!!"
그 액체가 무엇일까. 생각하기 이전에 작으면서도 예리한, 온기를 품은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가 말을 잇지 못하는 새 미야베는 서서히 목덜미에 피를 뿜으며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순백의 남자는 털썩, 쓰러져 그 자리에서 서서히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는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분명 웃었던 것 같았다.
젊은 남자가 며칠 만에 그의 병실을 방문했을 때, 마침 미야베는 일어나 책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창문을 열어두었기 때문인지 문이 조금 세게 닫혔지만, 그는 인기척이 난 곳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차게 물었다.
"뭐 하러 온 건가, 자네."
문득, 얼굴 아래 목덜미를 감고 있는 붕대를 훑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것을 보는 순간 혀가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젊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면회가 허락된 시간 내내 오래도록 서 있는 동안, 젊은 남자는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몇 차례씩이나 달싹거렸지만 그 입은 단어 하나조차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얼마나 그랬을까, 돌연한 그의 움직임에 젊은 남자는 순간 긴장한 듯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읽고 있던 문고판형의 책을 덮은 다음 책 표지를 손등으로 매만지며 깊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앉아 있었다. 나가라는 재촉은 아니거니와, 예상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도 아닌, 깊은 한숨-
그뿐이었는데, 그것으로 모든 것이 부정당한 듯한 기분이 들어, 젊은 남자는 처음으로 미야베의 눈앞에 무너질 듯 주저앉아 오열했다. 병실 안에 서러운 울음소리만이 울렸다. 그동안 그마저도 역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야베는 눈을 내리깔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그는 그제서야 두번째로 입을 열었다.
"...구차하네."
"......압니다... 그래도......살리고 싶었습니다. 계속...당신을 보고 싶었어..."
그 말에, 미야베는 붕대가 감긴 목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그리고, 한 마디를 내뱉은 다음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니, 자네는 단지, 2막을 보고 싶어서 날 살려냈을 뿐이야.. 무대에서의 나만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 오랜만에 묘한 느낌으로 잡글. 딱히 주제를 정하지 않고 쓴 글인데, 일단 자존심 주제로 보냈습니다. 아저씨가 나오니까...:)
그나저나 어떤 계기로 일단 구할 수 있는 가부키 관련 자료를 죄다 뒤지고 있습니다. 뭔가 많이 심오해 무서워 왜이래... 하면서 간만에 총체적 난국을 체험하고 있어요. 차라리 뮤지컬이 편하지 아아 진짜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