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5월 23일
[Good Omens] 세인트 제임스 공원의 청혼
- 굿 오멘즈, 번역판 제목으로는 멋진 징조들의 허접잖은 팬픽.
- 책을 읽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구석이 있으니 원작을 안 보신 분은 알아서 넘어가 주시길.
할 일이 있건 없건 세인트 제임스 공원에 자주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낙타털 코트를 입은 우아한 손의 남자와 목 아래부터 발끝까지 침침하게, 하지만 세련되게 차려입은 티가 나는 젊은 남자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한 5분 정도를 더 관심 있게 지켜본다면 어느 한쪽이 선글라스 너머의 오리에게 짖굳은 시선을 보내면서 이죽거리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덤으로 수면의 빵 조각을 흐뭇하게 받아문 오리가 곧바로 물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중요한 건 구경꾼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이유로 열 받기 일보직전까지 간 오리의 억울한 심정이 아니라 이 두 남자다. 아지라파엘과 크롤리.
크롤리는 사실, 웃고는 있지만 사실은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형식상으로나마 있던 용건은 그 역할답게 일찌감치 끝난 뒤였으니 당장 할 일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아지라파엘의 손에 들려 있는 빵 조각이 눈 앞의 식욕이 왕성한 오리들에게 전부 던져지려면 적어도 5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했으며, 또한 리스로 식사를 하러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일렀다. 아침과 점심의 애매한 경계에서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옆에서 우아한 손놀림으로 빵 조각을 던지는 천사의 평온한 표정을 관찰하는 것 뿐이었다. 때로는 위에서 말했다시피 방해도 좀 해 주면서.
수면을 향해 나른하면서도 평온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그저 좋다- 라고 크롤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괜한 오리가 물 속에 머리부터 처박힐 때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것 또한 보고 있으면 귀엽다. 하지만 이래 보여도 그는 엄연히 천사며, 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조차 상관없다 싶을 정도로 이런 존재에게 넋이 나가 있는 자신이 한심하다 생각할 때도 있긴 했다. 오죽하면 자신을 둘로 나눠서 진지하게 상담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을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악마는 자신을 둘로 나누는 재주가 없지만 말이다.
"왜 그러나?"
의구심이 조금 섞였지만, 여전히 선량한 표정으로 천사가 물었다. 크롤리는 흠칫, 하고는 시선을 다시 오리 쪽으로 돌렸다. 옆에서 오늘따라 너무하군- 하는 한숨같은 목소리가 얼핏 흘러나오는 걸 들었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정확하게 말하려면 무시하려고 아주 잠깐 노력했지만 악마의 조심성 없는 시선은 다시 오리들과 아지라파엘 사이를 넘나들고 있었다. 그 사이 빵 조각을 다 뿌린 모양인지, 자리에서 일어난 아지라파엘은 봉지를 휴지통에 집어넣고 나서 근처 벤치에 주저앉았다. 크롤리도 따라 앉았다.
"자네라면 단번에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오늘만큼은 의외로 끈질기더군."
"새삼스럽게 뭘 그러나."
"그렇긴 하지만... 선한 쪽인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요지는, 좀 더 악마다운 일을 하라는 거야."
악마다운 일이라니- 라고 물을 틈도 없이, 천사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제 갈 데까지 간 것 같아."
"어째서?"
"글쎄, 아마겟돈을 겪어서 그런가."
크롤리가 고개를 저으며 정정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마겟돈 직전이겠지. 불발에 그친 그것 말야."
"그래도 내가 명색이 선한 쪽인데, 어느 정도는 윗분 뜻에 맞춰 줄 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지만 그래도 좀... 뭐랄까... 죄책감 비슷한 것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안도하게 된단 말야. 게다가 나 자신이 전보다 조금 더 대범해진 것도 같고.."
"어차피 위에 있는 작자들은 누구든지 일만 성사된다면 상관없는 존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랬지- 맞아. 그런 거겠지?"
아지라파엘은 씁쓸한 듯 웃었지만, 그 말 때문인지 잠시나마 얼굴에 죄책감이 머무른다.
그런 표정이 안쓰러워 보이면서도 본능으로 머리에 피가 끓어오른다 싶은 순간,
크롤리는 어느 새 잘 손질된 아지라파엘의 양손을 붙잡고 핀트가 한참 엇나간 말을 외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천사 양반?.... 나와 결혼해 줘!"
그 반경의 오리와 산책 중인 사람들에게라면 충분히 들리고도 남을 만한 외침이었다.
크롤리는 첫 번째로 손의 감촉을 느끼고, 두 번째로 제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그는 곧 주변의 모든 생물을 향해 선글라스 너머로 잡아먹을 듯한 시선을 보냈고, 그들은 자리를 떠났다. 오리들이야 언제나 빵 조각에만 관심을 두는 족속이니 말할 것도 없었지만 크롤리가 노려보자 약속이나 한 듯 물에 머리를 처박고 가라앉았다. 그리고 무해하고 전혀 초자연적이지 않은 M19 요원을 향해 헤엄쳐 갔다. 하지만 방해꾼들은 사라졌다 해도 눈앞의 천사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크롤리는 머리를 잡아뜯고 싶을 정도로 당혹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상황에 남아있는 손이라고는 없었지만. 크롤리는 순식간에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 제길... 아지라파엘? 이거, 그러니까...그냥 눈 앞에 있는 악마가 잠시 미쳤다고 생각하고 뿌리쳐 줬으면 좋겠는데."
"이 손을 잡고 있는 건 자네니까 손만 떼면 되잖아."
"제기랄! 내가 놓기 싫으니까 그런 거지, 놓고 싶었으면 벌써 한참 전에 놨다고!"
크롤리가 외쳤다. 아지라파엘은 그제서야 뒤늦게 눈을 크게 뜨고 악마에게 잡힌 손을 바라보았다. 응시당하는 쪽의 속이 탈 만큼 머뭇거리기만 할 뿐 천사는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그를 똑바로 올려다본 천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좀 곤란해."
"어째서?"
"난 아무래도 자네 손만큼은 뿌리칠 수 없거든."
"또 선한 쪽 타령을 할 거면 그만 해, 천사 양반."
크롤리가 쉿쉿거렸다.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걸 놓으면 자네가 곤란할 것 같고, 잡게 내버려 두면 내가 곤란해.."
"그 곤란함, 나와 같은 심정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 나야 비슷하다고 해도 좋겠지만, 아무래도 위의 입장이 더 중요한 거 잘 알잖아.."
"이렇게 청혼까지 받아 놓고?"
"게다가 나나 자네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본질만큼은 갈려 있잖나... 그래서, 더 안 될 거라고 생각하네만. 아닌가?"
부정할 수 없지만 괜히 화가 난다. 크롤리는 다시 시선을 밑으로 내리깐 아지라파엘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일어나 그를 이끌고 벤틀리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아지라파엘은 크롤리에게 잡힌 손목이 얼얼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 없게 말을 한다면 화를 낼 것이 분명했고 실제로도 그는 그럴 작정이었다. 크롤리는 벤틀리에 올라탔고, 막 내팽겨쳐진 한쪽 손목을 아픈 표정으로 감싸쥔 아지라파엘 역시 조수석에 올라탔다. 악마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천사 양반, 말 나온 김에 메타트론과의 교섭 통로를 좀 열어줘야겠어."
"열 수는 있지만... 잠깐, 크롤리. 대체 뭘 어쩌려고! 설마....!"
"어차피 위의 승낙만 받으면, 아까 그 청혼의 대답을 해 줄 거잖아?"
천사는 곧바로 제정신을 차리고는, 그를 말리려고 시도했다.
"크롤리? 일단 좀 진정해. 승낙을 받고 말고는 둘째 치더라도 상대는 그분의 대변인이야. 메타트론이라고! 말이 안 통할 거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돼."
"...... 진심인가?"
"이 기회에 악마의 진심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지. 그리고 참고로, 악마다운 짓을 하라고 한 건, 자네야."
악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다. 어느 새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한 벤틀리에서 당장 천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쩔 수 없이 붉어진 뺨을 숨기려 노력하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잡소리
- 오랜만에 쓰는 굿오멘즈 팬픽... 이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300% 부족하지만. 또 저질렀습니다. 발단이 된 것은 <걸어서 세계속으로> 뉴질랜드 편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처음에 썼던 것과 이어질 듯 말 듯한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이것도 뭐 신나게 썼다면 신나게 썼다고 말이야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좀 비루하네요.(웃음)
-「인간의 영혼이 내세에서 즐기는 음식은 비교적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천사들은 어떤가? 천사의 요리에 대한 본질은 수세기 동안 논란이 되어왔다. 이슬람교 학자 이븐 마자흐(Ibn Majah)는 천국 주인의 음식은 오로지 "신의 영광"뿐이며, "신의 신성함을 찬양"함으로써 배를 채운다고 주장했다. 마크 트웨인은 천상의 음식은 분명 수박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많은 증표로 봤을 때, 천사들은 구운 빵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중세에 천사들의 식욕에 대한 추측이 점점 불어나면서 너무 격렬해지자, 급기야 바티칸에서 천사들은 먹지도 간음하지도 않으며 성별도 없다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스튜어트 리 앨런,『악마의 정원에서』88-89p, 357p.
마크 트웨인에서 신나게 뿜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천사 양반은 미식가인걸... 차라리 중세 때가 훨씬 정답에 근접할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 천사를 미식가로 변모시킨 사람은 물론 비암씨겠지.
- 예전에 아지라파엘을 포동포동하고 길쭉하고 새하얀 소시지....같은 이미지로 생각했던 거 취소. 웹질하면서 팬아트라던지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원작의 아지라파엘 묘사 보고 있으면 빼도박도 못하고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고! 물론 이쪽이 좀 포동포동해서 귀여울 것도 같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수줍고 귀여운 미중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달까... 하고 그렇게 암암리에 그려대고 있습니다. 이래서 취향이란! 취향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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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5/23 11:11 | 다갈색 연습장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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